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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갈색 폭격기 차범근축구 이야기 2023. 6. 21. 03:08728x90반응형SMALL
15년 동안 독일 국가대표팀을 이끌며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조국에 4번째 우승을 안겨준 전 독일 대표팀 감독 요하임 뢰브, 과거 이 남자를 교체 선수로 만들어버리던 한 동양인이 있었습니다. 터질듯한 허벅지를 자랑하며 독일 분데스리가를 휘젓고 다니던 대한민국의 차범근입니다.
차범근은 대학 재학 중 당시 최연소로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이후 신탁은행과 공군에 입단하여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면서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을 알리게 한 것은 국가대표 경기에서의 뛰어난 활약 덕분이었습니다. 얼마나 뛰어났는지 스탯으로 보자면 국가대표로 데뷔한 1972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기록하며 당시 24살 139일로 당시 기준 세계에서 최연소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 당시 가끔씩 해외 클럽들을 초청해서 친선경기를 치렀었는데 한국으로 와서 경기를 했던 팀 중 프랑크푸르트라는 팀과의 경기에 뛰어난 활약을 하던 대로 보여준 덕에 분데스리가 팀들의 관심을 받게 됩니다. 결국 꾸준한 관심을 받던 중 1978년 12월 겨울이적시장에 다름슈타트에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차범근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제대 후 분데스리가 진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당시 공군의 참모총장이 공군팀의 전력강화를 위해 2년뒤 전역을 약속하고 공군에 입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약속된 시간이 흐른 2년 뒤 차범근은 복무기간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휴가를 받아 독일로 날아가 다름슈타트와 계약을 맺고 곧바로 리그 한 경기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공군 측은 갑자기 태도를 바꿨고 출국 11일 만에 다시 귀국해 공군에 복귀해서 당시기준으로 1년 정도를 더 복무하고 만기 전역을 하게 됩니다. 군복무가 계약과 다르게 길어진 탓에 당연히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은 무효화되었고 차범근은 전역 후 다시 다른 분데스리가 팀인 1979년,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하게 됩니다.
프랑크푸르트에 오자마자 첫 시즌, 차범근은 팀을 UEFA컵 정상에 올려놨고 이에 더해 분데스리가 전체 공격수 중 3위를 기록하는 등 첫 시즌부터 엄청난 활약을 펼칩니다. 그 후 꾸준히 매 시즌 두 자릿 수 골을 기록하는 선수가 되었지만 프랑크푸르트의 재정악화로 인해 당시 팀 내 고연봉자였던 차범근은 바이엘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하게 되죠. 프랑크푸르트에서 4시즌밖에 뛰지 못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최고 전성기에 뛰었던 최고의 선수이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프랑크푸르트 팬들에게는 유명한 이름입니다. 2013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팬투표로 선정한 역대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반응형1983년 레버쿠젠으로 이적 후 당시 레버쿠젠의 성적은 우승권 경쟁과는 거리가 멀었던 리그 중위권 팀이었습니다. 차범근은 그런 레버쿠젠으로 이적한 후에도 팀은 상관없다는듯 매 시즌 두 자릿수 득점행진을 이어나가며 결국 85-86 시즌 38경기 19골을 넣어 아시아 선수로서 유럽 4대 리그(분데스리가, 프리미어리그, 라리가, 세리에A) 최다골을 넣게 됩니다. 이렇게 차범근의 활약에 힘입어 중위권이던 레버쿠젠은 시즌을 6위로 마감하며 팀을 UEFA컵 진출에 성공시킵니다. 그리고 그 UEFA컵도 차범근은 뛰어난 피지컬을 바탕으로 강한 슈팅력, 왕성한 활동량, 높은 체공력과 더불어서 헤더슈팅과 연계능력이 뛰어난 완벽한 무결점 스트라이커 역할을 하며 팀을 우승으로 곧바로 이끄는 활약을 펼칩니다.
분데스리가에서는 보통 최전방에서 투톱으로 뛰었지만 국가대표 경기에서는 윙어로 플레이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습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득점력 못지않게 연계플레이에서도 강점을 보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인사이드 패스, 원터치 패스가 장점이었으며 크로스도 수준급이었던 선수였습니다. 또한 강한 몸싸움을 하는 것과 반비례로 부상도 잘 안 당하던 철강왕 이미지에 굉장히 신사적인 플레이를 하는 선수였으며 이를 증명하듯 현역시절 차범근이 받은 카드는 옐로카드 1장이 전부라고 합니다.
차범근은 1989년 은퇴를 할 때까지 98골을 넣으며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득점자에 이름을 올렸으며 분데스리가에 있으면서 각각 다른팀(레버쿠젠, 프랑크푸르트)에서 두 번 이상 우승을 해본 커리어도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점은 지금까지도 이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전 세계에 9명 밖에 없다고 합니다.
1989년 은퇴 후 고국 대한민국으로 귀국한 차범근은 곧바로 축구 교실을 여는 한편 1991년 현대 호랑이 축구단의 감독으로 부임합니다. 차범근은 전임감독이던 김호감독의 기술축구와는 다른 템포축구 색체를 팀에 녹여내어 감독부임인 첫 해 1991년 K리그 준우승에 기여합니다. 그렇게 1994년까지 울산의 감독을 맡으면서 통산 55승 50무 48패를 기록했으나 1994년 시즌 후 성적 부진으로 경질됩니다.
SMALL이후 차범근은 1997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됩니다. 차범근은 자신이 선수시절 많이 배웠던 독일식 3-5-2 포메이션을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활용하여 승승장구 합니다. 역대 월드컵 중 우리나라가 최종예선을 가장 손쉽게 통과한 월드컵이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며 국내에서는 1승을 넘어 16강도 가능하지 않겠냐고 설레발을 쳤지만 월드컵이 시작되자 기대는 산산조각이 나게 됩니다. 첫 경기 멕시코전부터 골을 넣은 하석주가 백태클로 퇴장을 당하고 역전패를 당했기 때문이죠. 언론에서는 당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던 최용수의 결장을 두고 차범근의 리더십에 대한 비난도 등장했습니다. 곧바로 이어진 두 번째 경기 네덜란드전에서는 0-5 라는 굴욕적인 패배와 함께 차범근은 단숨에 역적이 됐고 결국 불명예스럽게 경질을 당하게 됩니다.
월드컵 이후 차범근은 월간 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축구협회를 비난하고 K리그 승부조작설을 제기하여 축구협회의 분노를 사 한국 축구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5년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AFC 측에서 아시아의 축구영웅을 이런 식으로 막대하면 안 된다는 언짢은 반응을 보이자 축구협회는 자격정지를 3년으로 단축하게 됩니다.
그 후 차범근은 중국으로 건너가 감독생활을 하게 되지만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결국 2004년 수원의 감독으로 K리그에 복귀하게 됩니다. 수원에 부임한 차범근 감독은 피지컬을 강조하는 축구를 선보이며 시즌 초 불안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수비적인 부분을 상당 부분 많이 보완해내고 결국 리그우승을 이루게 됩니다. 2005년 전략적으로 키우고 있던 어린선수들을 대신해 김남일과 송종국 등 즉시 성적을 뽑아낼 수 있는 선수들을 데려와 팀을 자신의 색으로 꾸며내면서 K리그 리그컵 우승을 얻어냅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리그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는데 이후 내리막을 걸으며 2000년에 수원의 최하 성적인 10위를 기록하게 됩니다. 그 후 2008년엔 리그와 리그컵 더블을 달성하다가 다시 2009년부터 팀의 불성실한 선수들과 마찰을 빚는 등 성적이 떨어지고 2010년에도 좋은 경기력을 보이지 못해 결국 2010년 2월 20일 차범근은 성적부진의 책임을 지고 자진사퇴를 하게 됩니다.
차범근 감독님의 선수시절부터 감독 경력까지 알아보았습니다. 화려했던 선수생활에 비해 감독생활에서 자주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 같아 마음이 아프네요. 지금까지 해외에 대한민국에도 이런 월드클래스 선수가 있다는 걸 머나먼 유럽에 일찍부터 갔었던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무결점 스트라이커 차범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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